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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구려를 계승한 해동성국, 발해

by 서진수설001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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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서진수설입니다. 

 

오늘은  발해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발전했던 나라인데요.

 

지금부터 발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발해_1

 

 

 

 

해동성국 발해의 역사적 배경

발해는 698년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에 도읍을 정하면서 건국되었습니다.

 

발해는 중국, 일본과 교류하며 발전하였고,

 

9세기 선왕 때에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발해가 건국될 당시, 한반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였습니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당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면서 신라와 당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당의 지배를 피해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대조영은 이들을 규합하여 발해를 건국한 것입니다.

 

건국 초기에는 당과의 대립이 지속되었지만,

 

무왕 때에는 당의 산둥반도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상경 용천부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이후 선왕 때에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완성하였습니다.

 

또 무역이 발달하여 당, 일본, 신라, 거란 등과 교류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성격을 나타내며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10세기 초, 거란의 침략으로 인해 멸망하였습니다.

 

 

 

고구려의 계승자로서 발해의 정체성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확인됩니다.

 

첫째, 발해의 왕들은 스스로를 '고려왕'이라고 칭했습니다.

 

둘째, 발해의 유적지에서는 고구려의 무덤 양식과 건축 양식이 발견되며,

 

셋째, 발해의 주민 구성에서도 다수를 차지한 것은 말갈족이었지만,

 

지배층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습니다.

 

넷째, 발해의 문화 역시 고구려의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했으며,

 

다섯째, 발해의 외교 문서에서도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며,

 

발해가 우리나라의 역사에 속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만 일부 중국 학자들은 발해가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발해의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특성을 무시한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발해의 정치 체계와 사회 구조

발해의 정치 체계는 당의 3성 6부제를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요소를 가미한 2 원적 체제였습니다.

 

정당성 아래에 6부를 두고 그 장관을 대내상이 겸하게 하여

 

국정의 중심을 정당성에 두었으며, 선조성과 중대성은 각각 충·인·의 3부를 나누어 관할하였습니다.

 

지방 제도는 5경 15부 62주로 이루어졌으며,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어 중앙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사회 구조는 귀족, 평민, 노비 등의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귀족은 왕족인 대씨와 고씨를 비롯하여 유력 가문 출신으로 높은 지위와 특권을 누렸으며,

 

평민은 농민이 대부분으로 조세 납부와 부역 의무를 졌으며,

 

노비는 매매나 상속이 가능한 존재였습니다.

 

발해의 신분제는 신라에 비해 개방적이어서,

 

상층 귀족 내부에서도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였고,

 

평민도 노력에 따라 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발해_2

 

 

 

 

경제 및 무역 활동: 해동성국의 번영

발해의 경제적 기반은 농업이었습니다.

 

밭농사 위주의 농업이 이루어졌으며, 주요 작물은 콩, 조, 보리, 기장 등이었습니다.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었고 수리 시설도 확충되어 생산량이 증가하였습니다.

 

어업도 발달하여 물고기와 소금이 많이 생산되었으며,

 

모피, 녹용, 사향 등의 특산물도 있었습니다.

 

상업도 발달하여 수도 상경 용천부 등의 도시에는 시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하였습니다.

 

당,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을 하였으며,

 

동해와 남해의 바닷길을 이용하여 일본과 교류하였습니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으며,

 

수입품은 귀족들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습니다.

 

대외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문화를 발전시켜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번성하였습니다.

 

 

문화와 예술: 독특한 발해의 정체성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과 말갈의 문화를 수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불교가 성행하였고, 유교와 도교도 일부 받아들여졌습니다.

 

건축에서는 상경 용천부의 궁궐과 사원 터에서 볼 수 있듯이

 

상경 양식이라는 독특한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무덤에서도 벽돌로 쌓는 방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 나가는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발해의 미술은 웅장하면서 건실한 기풍을 지니고 있으며,

 

고구려의 전통적인 요소를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여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자아냅니다.

 

공예 부문에서는 기와와 벽돌을 비롯한 토기와 자기가 대표적입니다.

 

자기는 가볍고 광택이 있으며, 종류나 크기, 형태 등이 다양합니다.

 

문학으로는 정혜공주 묘지와 정효공주 묘지 비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비문은 세련된 4 · 6 변려체로 쓰여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표기하는 향찰이나 이두와는 다른 방식인 구결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이는 당시 동아시아 각국의 문자 체계를 비교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발해와 주변 국가와의 관계

발해는 중국, 일본, 신라 등과 교류하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습니다.

 

중국과는 초기에는 대립하였으나 문왕 때부터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당의 제도와 문화를 수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8세기 후반에는 흑수말갈을 두고 당과 대립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발해는 9세기 전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여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였습니다.

 

일본과는 727년(무왕) 사신을 보내 처음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이후 활발하게 교류하였습니다.

 

신라와는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경계심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발해의 멸망과 역사 속에서의 위치

발해는 거란의 침략으로 인해 926년에 멸망하였습니다.

 

거란은 발해의 내부 분열을 이용하여 쉽게 수도 상경 용천부를 함락시켰습니다.

 

발해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 중 하나였으며,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나라였습니다.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를 융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잊혀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에 의해 '발해고'가 집필되면서

 

비로소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발해_3

 

 

 

현대에 있어 발해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대한민국의 역사 인식을 확장 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라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고구려와 발해를 포함한 한반도 북부 지역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또 드넓은 영토를 경영했던 경험은 통일 한국의 미래를 구상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부심을 높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발해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 중 하나이며,

 

고구려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받아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을 통해 발해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다음에도 더 유익한 정보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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